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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천개의 보라(하)

순천의 시화랑 은하수에서 시와 그림에 빠져들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문득 지난 시카고에서 보낸 45년의 삶이 주마등 같이 지나갔다. 브라운 라인 전철 안에서의 난감했던 하루의 시작, 어디에 발길을 두어야 하나? 두려운 시간의 늪에서 어떻게 나와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늦은 시간 로렌스 아파트 포치 계단을 오르다 말고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던 내 젊은날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기다려야 했고, 참아야 했던 날들도 지나고 그리움을, 기다림을 떠나보내고 지금 돌아보니 나에게 남은 건 그림과 시였다.   배롱꽃 지고 나면 / 누군가 날 부르는 소리 / 배롱나무 가까이 지날 때마다 떨어진 꽃잎 / 안타까운 내 마음이라 말하기로 합니다 // 배롱꽃 지고, 처진 가지 사이로 / 어둠으로 쓰러지는 밤처럼 하루도 저물고 / 꽃잎 몇장 새벽 이슬에 반짝이는 마음 / 당신을 생각하였노라 말하기로 합니다 // 같은 마음으로 걷고, / 같은 곳을 향해 눈빛을 맞춘다는 것 / 달빛 가슴에 담을 수 있다는 것 / 서로의 담이 허물어진 탓이라 말하렵니다 / 미시간호수 낮은 파도 소리 / 새해 첫 날 발끝까지 들렸던 소리 / 그 소리 일몰의 파도와 닮아간다 말하기로 합니다 // 침묵이 오래 이어진 날들 / 깊이 뿌리내리기 위한 것이 되려니와 / 반갑던 이름 모래알처럼 손틈으로 빠져 나가려할 때 / 그 이름 가볍게 부르지 않음은 / 한껏 피었다 지는 배롱꽃 나무 아래 / 시들기 전 부서져 흙으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 어느 날, / 나에겐 늘 먼 곳이어서 바라만 보았던 / 별빛처럼 다가오지 않는 깜깜한 밤, / 밤처럼 아득해지는 당신의 웃음은 / 훠얼 훨 내 안에서 어둠으로 만져지고 /  나는 어둠으로 지는 밤이 되기로 합니다   글을 그림처럼 쓰고, 시를 그림처럼 그린다. 곽 시인의 시작노트에 쓰여진 글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 그의 하루하루의 삶이 노트 위에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손에 들려 책장이 넘겨진다는 것.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일 수도 있고, 혹은 필연적인 일일 수도 있어 오랜 시간 내게 허락되었던 길. 그 길을 걸었던 시간 속에서 수많은 날줄과 씨줄을 통과한 후 만나는 순간. 밤은 길었다. 보이지 않는 저 끝에서부터 반대편 저 너머까지, 밤은 까마득한 선이다. 휘청이지 않는 철심 같아서 의식은 곧게 깨어있어야 했다. 의식은 의식 위에서 매미소리 같은 여운으로 매달려 있어야 했다. 까만 철심이 다리같이 뻗은 밤은 여전히 길었다.   시카고로 돌아온 후 내일이면 꼭 한달이 지나간다. 가능한 무엇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시차를 이기려면 낮에 자지 말라고 하지만 졸리면 자고 잠들지 못하면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몇일은 비가 쏟아졌고, 몇일은 뜨거운 햇살에 잔디가 타들어갔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엎드려 풀과 나무와 꽃과 놀았다. 머리속에 남겨지는 생각을 버리려고 푸른 나무 사이를 걷기도 했다. 꿈이 그려질수록 시간을 의도적으로 미루고 있다. 곽재구 시인이 ’꽃으로 엮은 방패’ 시집에 그림처럼 그려 내 손에 쥐어준 글귀, 한달은 배불리 먹고도 아직 버티고 있다.   신호철 선생님께- // 마음의 향기 소담하게 / 스민 아름다운 시화집 / 잘 보았습니다 고독했지만 / 행복한 날들 아니었겠는지요 / 삶의 남은 시간들 / 오래오래 물소리 같으시기를 // 2023. 6. 8 /은하수 갤러리 / 곽재구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파도 소리 물소리 같으시기 시간 로렌스

2023-07-24

[글마당] 바다가 또 불렀다

바다를 보고 있으면 나는 작아진다. 파도가 멀리서 거친 소리로 다가오면 나는 옛 생각에 잠긴다. 파도가 흰 거품을 물고 와 남기고 가버리면 나도 파도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다.     올여름은 더웠다. 나는 더위를 모르고 지냈다. 더우면 바닷물에 들어가 있다가 나왔다. 젖은 몸을 태양 아래 서서 말렸다. 주위 사람의 다양한 행동들을 둘러보다가 더워지면 다시 물속에 들어갔다.     물에서 나와 몸에 맞게 모래를 비벼서 편하게 몸을 뉘었다. 사방이 훤히 트인 바닷가에서 비키니를 입고 누워 있어도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다. 파도 소리를 두세 번 들으면 달콤한 깊은 잠에 빠진다. 내 코 고는 소리에 놀라거나 아이들 노는 소리에 깨어난다. 먼바다를 망연히 바라보다가 물에 목만 내놓고 다시 잠긴다.     햇볕에 노출되면 피부 노화가 빨리 온다지만, 나는 선탠을 포기할 수 없다. 비키니를 입고 자고, 걷고, 해수욕을 반복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됐다. 하늘을 나는 갈매기라도 된 느낌의 반복이 나만의 공간 속에 있는 듯 자유롭다.     이러한 행위는 실생활에도 영향을 준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 꼴리는 대로 옷을 입고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비난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각자 끌리는 대로 살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된다. 그들의 입으로 하고 싶은 말 하고 그들의 손가락으로 쓰고 싶은 댓글 쓰는데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타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변명하기도 귀찮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나는 그저 바닷물이 나갔다가 파도를 끊임없이 쉬지 않고 물고 오듯 내 일하며 삶을 즐긴다.     남들에게 들은 비난들이 기억나지도 않지만, 듣는다고 한들, 내가 받으면 내 비난이 되지만 내가 받지 않으면 나와 무관한 일이라며 나 자신을 훈련하고 습관화한다. 오랜 세월 별 볼 일 없는 몸을 드러내고 선탠하고 바닷가를 거닌 것이 누군가의 시선과 비난에 무관심해지게 훈련할 수 있는 한 방법이었다. 쉽게 말하면 뻔뻔해지면 남의 시선과 말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나에게 삶은 꽤 흥미로운 열린 무대다. 내 할 일에 빠져 일하다가 즐기는 방법을 찾아 바다, 산, 들 그리고 낯선 길을 찾아 헤매다 보면 나는 어제와 다른 내가 되어 있다. 자연은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고 종교다.     내가 두고 온, 파도 소리 들어줄 인적이 끊긴 쓸쓸한 바닷가가 떠오르자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수임 / 화가·맨해튼글마당 바다 파도 소리 피부 노화 태양 아래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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